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석 치사 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사건의 발단은 6월 3일 한양대학교 학생회관을 배회하던 피해자 이석이 "남총련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피해자가 대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챈 가해자들은 이석을 붙잡아 학생회관 5층 교지 자료실로 데려갔고 이후 이날 18시께부터 피해자를 경찰 프락치로 몰아 4일 09시까지 폭행, [[고문]]을 했다. 특히 한양대 투쟁국장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분말을 뿌리는 등 잔혹한 고문을 했으며 [[멍석말이|폭행 중엔 침낭으로 감싸 물을 뿌리면서 경찰 진압봉으로 때려]] 폭행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기까지 했다. 배주환에 대해서 사수대원들조차 지나치다고 말렸지만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한총련 내에서 조국통일위원장은 의장 다음의 서열 2위의 직책이다.] 이준구는 '''"지금은 전쟁상황이다.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고문을 독려했다.''' 이후 피해자는 캠퍼스 인근의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내상과 과다출혈로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한총련 측에서는 이에 대해 피해자에 대한 심각한 폭행은 없었고 피해자와 함께 잠을 자다 피해자가 숨을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그를 한양대병원으로 옮긴 것이라는 거짓 해명을 내놓았고 대책회의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 이후 경찰 조사를 통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비난을 받았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60500289126007&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6-05&officeId=00028&pageNo=26&printNo=2897&publishType=00010|한총련 측 해명을 담은 기사]] 주요 관련자는 다음과 같다. * 길소연(22, [[한양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 징역 7년 * 권순욱(24, [[건국대학교]] 2학년) - 징역 7년 * 이호준(24, 건국대학교 3학년) - 징역 5년 * 정용욱(20, 건국대학교 1학년) - 징역 3년 * 정욱열(19, 건국대학교 1학년, "황소대원"[* 건국대의 [[사수대]]를 '황소대'라고 불렀다. 참고로 건국대의 상징이 황소다.]) - 징역 장기 1년 6개월, 단기 1년 * 이모씨(19, 건국대학교 2학년, "황소대원") - 징역 장기 2년, 단기 1년 6개월 * 이창희(27,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가명 "뚱이") * 서총련 투쟁국장 김호(25,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 한양대 투쟁국장 배주환(21, 건축학과 4학년) *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준구(26, 건국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 당시 한양대 교내 상황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검찰은 각종 시위상황과 프락치 조사사실등을 강위원 한총련의장(27.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게 전화 등을 이용, 보고해 왔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했다. ] * [[강위원]] 한총련의장(27,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 이후 이재명 대선캠프에 합류했다.] * 한총련 정책위원(가명 "푸우"), 조직위원(가명 "순이"), 정책국장 등 15명[* 사건축소의 지시와 대책회의의 주재를 한 지하 지도부. 상해치사 및 범인도피 등의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 사건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이 비난 논평을 내고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제1야당 당수가 빈소에 조문을 가는 등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97년 11월 7일 서울지법 동부지원은 길모씨(23), 권모씨(24), 이모씨(24), 정모씨(20), 정모씨(19), 이모씨(19) 등 관련자에 상해치사죄 유죄판결을 내렸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10800209139010&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1-08&officeId=00020&pageNo=39&printNo=23703&publishType=00010|#]] 한편 피해자 이석은 1974년생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이다. 고향에 있는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에 있는 한 공장에서 선반기능공으로 일하다가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거리를 배회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60500209147010&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6-05&officeId=00020&pageNo=47&printNo=23557&publishType=00010|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준구 등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살인을 직접 지시한 자들이 출소했을 때 운동권에서는 이들을 '''양심수'''로 호칭하며 마치 국가권력에 부당하게 탄압당한 동지들이 출소해 감격의 상봉을 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16289|#]] 물론 실제론 양심수로 정의할 만한 의로운 개인적 소신과는 일절 관계가 없는 흉악한 범죄였다. 당시 서총련 투쟁국장이었던 김호는 사건 이후에도 [[미군]]을 흉기로 습격하는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것을 무용담처럼 술회한다고 한다. [[https://brunch.co.kr/@1980may18/4|#]] 당시 5기 한총련 의장이었던 [[강위원]]은 검찰 수사 결과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 강위원에 대한 1998년 대법원 판결(98도1395 판결)에 따르면 강위원은 이적단체로 지정된 5기 한총련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1998년 6월 한양대에서 5기 한총련 출범식을 주도하고 도심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처벌됐다. [[https://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2105349|#]] [[https://v.daum.net/v/19980730085800170|#]]][* 강위원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운동권 활동 시절에 저지른 성폭력 혐의로 [[미투]] 고발을 당했으며 본인은 이를 부정했으나 과거에 혐의를 모두 인정하거나 반성문을 작성한 등의 증거가 공개되었다. 혐의를 제기한 김모씨는 운동권 안에서 공공연한 성폭력이 저질러졌으나 조직 보호를 중요시하느라 사건들을 묻어 버렸다며 운동권들의 저열한 도덕성을 규탄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2953|#]] 이후 그는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여러 직책을 전전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 길소연과 이호준은 1999년 2월 25일 특별사면, 강위원은 1999년 8월 15일 특별사면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년만의 일이라 많은 비판이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